한국빈첸시오 바로가기

게시판

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용서, 그 시기(2019.03.1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141회 작성일 19-03-14 09:34

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타인에 의해서 얼굴 등을 맞거나 하게 되면 얼굴이 멍이들고 부어오릅니다. 멍이 가라앉고 나을 때까지 아프거나 고통이 멎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가 의도적으로 했든, 실수로 했든 간에 나을 때까지 아픔이나 고통이 멎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의 의도적 가격인 경우, 아픔과 함께 분하고 화가납니다. 나도 미움을 갖게 되어,  그의 의도적 행위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실수로 가격했다 하더라도, 고통이 있으면 힘이 들고 원망을 하게 됩니다.


아픔과 고통에 그대로 머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부러 던, 실수 던 상관없이 내가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는 미움이나 화, 원망이나 불편함이 있습니다.


상대의 힘이나 가격에 의해서 아프거나 고통을 쉽게 떨쳐내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상대의 불의함에 의해서 가격을 당한 고통에서 상대를 받아들이고,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상대가 내게 힘을 가하거나, 가격을 했다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특히 그의 악행과 불의함을 수용해야 하는가? 그런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용서에 관한 것이라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혼잡 속에 실수로 발을 밟거나 몸을 부딪치는 경우는 바로 그의 실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아닌, 의도적인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더더우기 용서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또한 실수가 작은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적지 않은 피해이고, 상해를 입힌 것은 상대 생명 안위를 거스린 것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보상이 이루어져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용서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미숙이나 실수로 차량 등에 사고를 내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와 함께 사람의 안위로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상대를 가격했을 때는 물리적 아픔 뿐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인 아픔이나 고통까지 준 것이어서 그런 행위를 수용한다거나 용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바로 이어질 수 있고, 또한 시일을 두고, 아니면 오랜 세월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대의 죄와 잘못, 악행과 그릇된 행동을 바로 수용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나 그. 상대의 앞으로의 건강한 생활이나 삶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은 실수나 어떤 작은 미숙함의 것들은 바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 뿐 만아니라, 우리, 공동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부끄럽고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며, 곧 그의 행위가 개인 뿐 만 아니라 공동체의 정신적, 심리적이 부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더구나 사회적, 역사적 가치에 악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을 단순히 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놓아두면, 미구에 더 그릇되고 포악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받아들이거나 쉽게 용서하는 것을 멈추는 이유는 모두의 건강을 위해입니다. 내가 상대로 부터 가격을 당했을 때 용서한다 하더라도, 고통은 지속됩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도 그 고통은 아픔과 함께 지속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안은 내가 용서했다고 해서, 그 용서가 온전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용서가 되는 것은 그 고통이 멎을 때 비로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실상 용서는 단순히 쉽게 용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건강해질 때, 또한 상대가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법적으로 건강하게 될 때 궁극적인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상대가 사회나 공동체에서 지위나 위치가 있고, 힘과 권력이 있는 경우에, 그가 힘을 불의한 방법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호도할 때, 한두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힘과 그 범주 내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공동체 모두가 함께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를 말할 수 없습니다.


고통과 좌절, 부정과 불의 등 굴절의 역사를 되새기고 깊이 알아듣도록 하는 이유는 그 사회, 역사 안의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의와 부정한, 굴절의 역사를 잘 알아듣고 개선하고 바르게 시작하는 역사의 길에서 모두가 행복한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단순히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단계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일생, 시대를 넘어서 용서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용서는 시기와 단계가 있습니다. 용서는 나도 그도, 우리도, 모두가 건강해질 그 때에 온전히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공동체적인 용서를 합니다. 신앙적으로 피해자인 나의 건강과 가해자의 선과 정의의,  건강한 자가 되는, 곧 복음적, 신앙적인 모두의 구원에 이르기 위한 용서여야 합니다. 그를 바로 용서하여 그가 죄인으로 남아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용서는 하느님의 성령의 은총으로 용서합니다. 성령께서는 용서를 식별해 주십니다.



이재을 신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