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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용서, 하느님의 은총과 앎(201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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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169회 작성일 18-12-13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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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의 은총과 함께 용서가 이루어지는 날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용서는 고통과 시련, 절망과 죽음의 골짜기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할 때 이루어집니다. 상대의 가격에 의해서 고통과 괴로움, 공포와 두려움, 미움과 미움을 갖게 됩니다. 이런 순간이나 과정을, 상당한 시간이나 세월을 거친 후에야 인간 상호 당사자의 관련에서 벗어나서 의미를 생각하고 더 크신 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 어려움과 고통, 갈등과 번민, 두려움과 공포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는가? 질문합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이런 어려움과 고통, 좌절과 번민을 그대로 두고만 보시나?

왜 그렇게 침묵만 지키고 계시나?

이토록 오랫동안 당신께 간구하고 있는데, 왜면하시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분. 그 선의와 공의로우신 그분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에 참여하려는 마음과 함께 우리는 공의의 용서에 점차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실 그렇다고 물리적인 나의 고통과 아픔, 좌절과 절망, 공포 등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가진 인간, 특히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옷을 입고 사는 인간에게 그것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성조들, 판관들, 예언자들, 신약의 마리아, 사도들, 제자들 모두가 그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조건의 환경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겟세마니로 가십니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 깨어있어라."

            마르 14, 34


그분도 그 역경과 절망적 상황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마르 14, 36


예수님 조차도 하느님 나라의 모든 길을 마무리하고, 수난과 죽음의 목전에서 공포와 번민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동반의 도움을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그 절망적 상황이 극복된 것이 아니고,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맡겨드렸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고 믿고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드리고 선언하십니다.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하시며

"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마르 14, 41-42


예수님께서 자신을 번민과 고통에서 수난과 죽음의 잔을 멀리하게 해달고 하면서, 자신을 그 죄인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수난과 죽음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개입하여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육신 곧, 인간의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 가치와 환경에서 심한 고통과 충격을 받은 상처받은 이가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와 그의 모든 가격과 충격의 고통의 과정에서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뜻을 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알게되는 은총의 순간에 용서의 전망을 보게되고, 올곧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역사와 이끄심을 생각할 때 공의의 용서의 길도 나아가게 됩니다.


공의의 용서는 단지 내가 그를 용서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의 계획과 그 넓이과 깊이와 높이의 용서 차원을 말합니다.


용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역사를 믿고 나아가는 가운데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육신을 곧 정신, 심리, 육체의 구조에서 상대를 용서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공의의 용서의 전망안에 나와 그와 모두를 바라보는 은총과 믿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용서는 하느님 은총에 모든 것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있고, 그 용서를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 속에 용서의 길을 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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