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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영상자료<제1부 빈첸시안의 소명-제1과: 소명이란 무엇인가?> (영상은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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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3회 작성일 18-08-2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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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빈첸시안의 소명]  제1과: 소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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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이 과목을 학습한 후에 여러분은;

소명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하고
빈첸시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믿음을 실천하라는 소명으로서의 빈첸시안의 사도직에 대하여 더욱 잘 이해하게 됨
 

시작기도: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7-39)
각 단원을 돌아가면서 천천히 묵상하듯이 소리 내어 읽습니다.

 

소개

소명이란 뜻을 가진 영어 voc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vocare가 어원으로서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소명이란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관련하여 특별히 선택된 일에 초대하며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빈첸시오 회원으로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증거자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도직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독서:

(미합중국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활동지침서 P4)

 

“모든 사람들이 그런 직분을 받지는 않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 그 직분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빈첸시오 회원으로서 빈첸시안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특별히 우리를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은 그의 서신에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숭고한 소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합니까?”

빈첸시오 성인께서 거듭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요”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크리스천들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은총에 따라 주님께서 불러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빈첸시오 회원들은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빈첸시안의 소명은 가난한 이웃들을 직접 돕고 협의회와 신앙공동체 안에서 같은 소명을 가진 평신도들간에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빈첸시안의 소명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의미로 표현됩니다.  믿음을 실천하고, 묵상하고, 변화하는 세상에 적용하는 것이 모든 빈첸시안과 빈첸시오회의 모습입니다.(미국이사회 활동지침서 4쪽)

잠시 묵상 하시고 마음에 와 닿은 단어/문구에 밑줄을 긋고 빈 공간을 이용해서 필기하십시오.

 

나눔:

빈첸시안이 된 것을 소명이라고 느낀 적이 있으며 주님께서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라고 불러주셨다고 생각합니까?

 

마침기도:

다같이 빈첸시오 성인께서 남기신 말씀을 기도로 바칩시다:

“우리들의 소명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내 이웃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내 이웃에게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그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도록 까지 사랑하셨듯이 사람들이 그들의 창조주를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심화 독서:

(다음 과를 시작하기 전에 읽으십시오.)

 

프레드릭 오자남의 소명 이야기

프레드릭 오자남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가 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프랑스 리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프레드릭이 7살 되던 해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이미 8명의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프레드릭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주님의 은총으로 프레드릭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밤 중에도 병든 이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프레드릭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오는 지혜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프레드릭은 신앙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믿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실망, 좌절, 양심의 가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유혹이 점점 강해져 감에 따라, 프레드릭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 신앙의 은혜와,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였으며 마침내 신앙의 회의가 끝나자 프레드릭은 자신을 바쳐 신앙을 보호하고 진리를 위해 일하기로 약속 하였습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18세때 프레드릭은 대학에 가기 위해 파리로 갔습니다.  혁명 이후 파리는 반 가톨릭적일 뿐만 아니라 가톨릭이나 크리스천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든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은 친구이자 조언자인 임마누엘 베일리와 시사토론을 하기 위해 자주 모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모임에서 혁명당원들이 “기독교는 낡았으며 소멸되었다. 과거에는 유용했을 지 모르나 오늘날 무슨 소용인가?  기독교가 무엇을 줄 수 있나?  무슨 일을 하고 있나?  당신들이 하는 일을 보여달라!”라는 도전장을 발표하였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을 보여달라”라고 한 말은 프레드릭의 가슴을 찔렸으며 그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달려가도록 하였습니다. 오자남은 봉사는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도움은 동정, 겸손, 사랑과 존경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의 삶을 통하여 지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프레드릭과 그의 동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좀 더 조직화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공식적인 조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833년 4월 23일 화요일에 프레드릭 오자남은 임마뉴엘 베일리, 오거스트 탈리앙뒤르, 프란시스 랄리에르, 폴 라마쉬, 펠릭스 클라베, 쥴레스 데박등과 함께 사랑의 협의회를 시작하였으며 이로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임마뉴엘 베일리는 프레드릭과 그의 동료들을 사랑의 딸회 로잘리 랑뒤 수녀님께 보냈습니다.  로잘리 수녀님은 방문할 수 있는 가정 명단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곤 잠시 생각에 잠기시며, 프레드릭과 그의 동료들을 바라보시면서 “형제님들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종으로서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처신할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처럼 힘든 과정을 겪었거나 어린 시절부터 결핍 속에 자랐다면 이곳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이 가지고 있는 질투와 증오를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여러분들에게 질투와 증오를 들어낸다 하더라도 친절하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이야 말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가져다 줄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도 여러분의 친절과 사랑을 더 고마워 할 것입니다.”

“프레드릭은 빈첸시오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프레드릭은 “혁명당원들 조차 빈첸시오 성인을 존경하였으며 하느님을 사랑해 온 죄를 용서하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보성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지 종교사회에서 우리를 드러내게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을 뽑는 것이 아니다.  빈첸시오 성인이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했듯이 우리도 성인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성인이 생각했던 것을 알아내고 그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주보성인은 우리가 이 현세에서 닮아야 하는 모델이며 하늘에서 우리를 보살피는 보호자이다.”라고 적었습니다.

 

프레드릭과 아멜리

프레드릭은 그의 나이 불과 27세에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최연소 교수가 된 것입니다.  프레드릭은 화재로 인해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였으나 교회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분노에 맞서면서 강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자신의 소명에 대해 자신을 성직자로 주님께서 부르신다고 생각하였지만, 프레드릭은 결혼성소를 깨닫고 1841년 6월 23일 28세의 나이로 그 당시 20세이던 아멜리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1845년 7월 7일 첫 딸 마리를 낳았습니다.  프레드릭은 결혼이야 말로 자신의 성사이며 소명이라는 깊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전세계 많은 빈첸시안들과 같이 혼인성사는 프레드릭과 아멜리에게 거룩함으로 가는 강력한 방법이었습니다.  프레드릭은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이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받은 고통이 그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정으로 인도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이 힘든 시기에 아멜리는 사랑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아멜리는 빈첸시오회에 관한 프레드릭의 꿈과 꿈을 믿었으며, 프레드릭이 용기를 잃을 때마다 희망을 주었습니다.

 

전통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칙은 프레드릭 오자남의 삶과 신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올 곧은 빈첸시안의 봉사방식은 가난하고 고생스럽지만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빈첸시오 성인처럼 프레드릭은 이 일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신 것이며 즉 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찾을 것이며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빈첸시안의 정신은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형제애로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빈첸시안은 일대 일로,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겸손하고, 단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빈첸시안이 된다는 것은 소명입니다.

프레드릭은 빈첸시오 활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성실성을 향상시키기 될 것이며  “사랑이 없는 활동은 빈첸시오회의 활동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빈첸시오회는 당장의 고통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상황을 개선하고, 크리스천 사회 정의의 개념, 모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 교육과 고용 평등의 기회 등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은 빈첸시안들은 하느님 사랑의 증거자가 되기 위해서 기도, 성서묵상, 교회의 가르침, 일상생활,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빈첸시오 성인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홀로 주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현존하시는 주님과 이웃 안에서 서로 서로 격려하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프레드릭은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자신의 삶의 여정도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느님의 모친이신 성모님께 깊은 공경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1853년 9월 8일 성모탄생 축일에 40세의 나이로 하느님께서 진실로 그를 빈첸시안으로 불러주신 것을 알고 삶과 활동을 통하여 성화된 후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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