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ald Ramson 전교회 신부님의 저서
"프레드릭 오자남과 기도하기" 에서 발췌
프레드릭 오자남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가 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프랑스 리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프레드릭이 7살 되던 해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이미 8명의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프레드릭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주님의 은총으로 프레드릭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밤 중에도 병든 이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프레드릭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오는 지혜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프레드릭은 신앙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믿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실망, 좌절, 양심의 가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유혹이 점점 강해져 감에 따라, 프레드릭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 신앙의 은혜와,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였으며 마침내 신앙의 회의가 끝나자 프레드릭은 자신을 바쳐 신앙을 보호하고 진리를 위해 일하기로 약속 하였습니다.
1831년 당시 18세였던 오자남은 더럽고, 음울하고, 사람들로 넘쳐나는 파리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프레드릭은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오자남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 황실법관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레드릭은 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꿈은 나중에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프레드릭은 적과 아군을 동시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가톨릭의 밝은 면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강의실과 대학 복도에서는 반가톨릭주의와 반교권주의의 공격을 듣고 느꼈습니다.
교회와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을 놀리고 비웃는 교수들이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프레드릭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 깊은 학생들과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뭉친 힘과 용기로 신앙의 진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연구회
프레드릭은 가톨릭 트리뷴지 편집장이었던 임마누엘 베일리와 함께 역사연구회를 결성하며 같이 일하였으며 매주 토요일에 만났습니다.
1833년 봄 회의 중에 성 시몬주의 옹호자로부터 프레드릭과 다른 동료들이 도전을 받았는데 성 시몬주의자들은 원리 및 강령은 중요하지 않고 사회 경제적인 힘으로 사회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한참 열띤 논쟁 끝에 Jean Broe라는 학생이자 성 시몬주의 동조자가 오자님과 그의 친구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비난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때 교회가 위대하였고 선의 원천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들의 활동을 알려주면 우리도 당신들을 믿을 것입니다." 성 시몬은 좀 더 평등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라고 기독교를 비판하였습니다.
프레드릭은 마음속으로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레드릭은 역사연구회 회원들을 위해 사회적으로 학문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선활동이다. 가난한 이들의 축복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프레드릭과 친구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지 알아보기 위해 다음 주에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1833년 4월 23일 프레드릭의 20번째 생일날 오거스트 타일랑디에르(Augustine Le Tallandier), 프랑소아 랄리에르(Francois Lallier), 펠릭스 클라브(Felix Clave), 쥴 드보(Jules Devaux), 폴 라마슈(Paul Lamache), 프레드릭 오자남(Frederic Ozanam)등 6명의 학생들과 그들의 조언자인 임마뉴엘 베일리(Emmanuel Bailly)가 가톨릭 트리뷴지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오자남은 반대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거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오자남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대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갑시다!" 이렇게 하여 그날 밤 자선을 실천하는 빈첸시오회가 탄생하였습니다. 프레드릭 오자남은 회의 주요 설립자이자 영감을 일으켰고, 회의 정신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학생들은 결혼한 성인인 베일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11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역사연구회와 비슷하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자선 협의회라고 이름을 정했으며 역사연구회는 사회적 학문적 단체이고 자선협의회는 봉사단체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들은 회의 이름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라고 변경하였습니다. 협의회 명칭은 보통 본당의 개별 단체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로잘리 랑뒤 수녀님에게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도움과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로잘리 수녀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며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가지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초기 회원들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배급표를 바르게 나누어 주도록 수녀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장
놀랄 만큼 빈첸시오회는 퍼져 나갔습니다. 5년간 프랑스 전역에 15개 센터에서 2,000여명 이상의 회원으로 늘어갔습니다. 빈첸시오회는 회원들 안에 있던 불씨를 살렸습니다.
회원들은 자신들의 개별 단체를 협의회라고 하고 자신들은 빈첸시안이라고 하였습니다. ,br>
초기부터 빈첸시안들의 주요한 임무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2명씩 짝을 지어 임무를 완수하도록 보내셨던 예수님의 권고대로 가난한 이들을 방문할 때 2명의 회원이 짝을 지어 나갔습니다.
빈첸시오회는 모든 형태의 자선활동을 하였습니다. 음식, 주거, 의복, 땔감 등의 물질적 지원이 필요한 곳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군인들을 위한 도서관을 세우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유혈충돌이 일어났을 때, 빈첸시안들은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모든 활동을 통해 회원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복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프레드릭은 살아있는 동안에 이탈리아, 벨기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독일, 미국, 네덜란드, 그리스, 터키, 예루살렘, 스위스, 오스트리아, 멕시코, 캐나다에서 빈첸시오회가 설립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은 "우리의 작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하느님의 섭리라고 간주될 만큼 충분히 대규모로 성장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