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영상자료<제1부 빈첸시안의 소명-제3과 빈첸시오 성인과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소명> (영상은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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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1회 작성일 18-08-28 16:30본문
[제1부 빈첸시안의 소명] 제3과 빈첸시오 성인과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소명
본문
학습목표
이 과목을 학습한 후에 여러분은
(1)빈첸시오 성인의 사제직을 더 잘 이해하고
(2)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는 빈첸시오 성인의 부르심을 더 잘 이해하고
(3) 복자 프레드릭의 결혼소명을 더 잘 이해하고
(4) 빈첸시오회를 설립한 복자 프레드릭의 소명을 더 잘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기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 1:18)
소개:
각 단원을 돌아가면서 천천히 묵상하듯이 소리 내어 읽는다.
빈첸시오 성인의 소명
어린 시절부터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사제직은 출세와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에 소명이라기 보다 일종의 직업선택이었습니다. 19세에 서품을 받았으며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록을 얻어 조기 퇴직을 희망하는 야망이 큰 젊은 사제였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마거리트 여왕 황실 법정의 담당 사제직을 얻어 파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워 마침내 유럽의 가장 유명한 가문중의 한 가문인 공디 가문의 담당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공디 가문의 방대한 지역을 방문하곤 했는데 폴빌(Folleville)을 방문하다가 우연히 한 죽어가는 사람의 고백성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교구에서 고백성사 담당을 하다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샤티옹 레 동브(Chatillon-les-Dombes)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가서 가정방문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최초의 자선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영혼의 어두운 시절을 겪고 있었고 만약 하느님께서 이 어두움을 없애주시면 자신의 전 생애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로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즉시 성인의 고뇌를 없애주셨으며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된지 17년 후 빈첸시오 성인께서 36세 때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습니다. 성인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잠시 묵상 하시고 마음에 와 닿은 단어/문구에 밑줄을 긋고 빈 공간을 이용해서 필기하십시오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소명
프레드릭 오자남은 매우 신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서 그의 부모님은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리용(Lyon)에서 살 때 프레드릭은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신앙을 되찾아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진리수호를 위해 봉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사라지면서 프레드릭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고 일생 동안 자신의 서약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프레드릭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습니다. 그 당시 파리에는 반 가톨릭과 반 성직주의 분위기가 팽배하였는데 프레드릭은 임마누엘 베일리의 지도하에 있는 역사연구회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역사연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회와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을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보여보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프레드릭은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의 나이 20세인 1833년에 6명의 젊은 학생들이 임마누엘 베일리와 함께 자선 협의회를 만들었으며 이로써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사제의 소명을 생각했었고 그 후 수년간의 식별의 고뇌를 거쳐 프레드릭은 평신도로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8세 때 아멜리 술라크로아(Amelie Soulacroix)를 만나 1841년 6월 23일 결혼을 하였습니다. 4년 뒤 외동딸 마리(Marie)를 얻게 되었으며, 프레드릭은 혼인성사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은 결혼생활과 가족에 대한 헌신은 물론이요 빈첸시오회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부르심을 실천하는 조화의 은총을 부여 받았으며 평생 동안 이 은총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잠시 묵상 하시고 마음에 와 닿은 단어/문구에 밑줄을 긋고 빈 공간을 이용해서 필기하십시오
나눔:
여러분들의 “소명”에 대해 나눔을 해 봅시다. 빈첸시오 성인 및 복자 프레드릭의 소명과 여러분들의 소명의 연관성 혹은 유사성 등이 있는지 말해 봅시다.
마침기도: 뉴먼 추기경님의 말씀을 기도로 함께 바칩시다.(미국이사회 활동지침서 3쪽)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실제적인 봉사를 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저는 저만의 사명이 있습니다 – 그 사명을 이 세상에서 알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 저는 제 사명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대한 하느님 사업의 일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큰 체인의 이음새이며,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창조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선한 일을 할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고, 평화의 천사가 될 것이며, 진실로 제가 사는 곳에 진리를 전파하며 오로지 하느님 계명을 지키며 저의 소명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겠습니다. 아멘”
심화독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가지 전에 읽어 주십시오.)
빈첸시오 성인의 소명 이야기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프랑스 남서부 작은 마을인 푸이(Pouy)에서 태어나셨습니다. 6째 중 3째 로서 3명의 남자형제와 2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소작농 계층으로서 가족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셨습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가족들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영리하셨기에 부모님께서는 사제로 만들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제는 소명의식이라기 보다는 괜찮은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제가 되면 명예와 부가 보장되므로 나중에 가족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직
성인의 부모님께서는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황소 2마리를 파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농부 가족에게 큰 희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께서는 신학교에 가셨고 1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공부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설득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서품은 다른 분들 보다 5년이나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야망이 큰 젊은 사제로서 성공해서 교회에서 직위를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돈을 마련해서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가족들을 돕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파리
사제 서품 후 8년이 지난 27세까지도 교회에서 받는 혜택이 거의 없었습니다. 성인께서는 프랑스 남부를 떠나 좀 더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 파리로 옮겨가셨습니다. 몇 년 안에 프랑스 여왕 법정의 담당사제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부자이며 영향력 있는 가문중의 하나인 드 공드(de Gondi’s)가의 가정교사이며 담당사제가 되었습니다.
성인의 나이가 33세가 되고 사제로서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고 직위와 영향력 면에서 보장받았다고 생각하셨을 때 도둑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죄가 없다고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사건은 즉시 판결을 받았기에 너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온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자신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당시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믿음이 흔들리는 시기를 거의 4년이나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성인께서는 이해를 못하셨으나 하느님의 섭리가 성인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인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영적 친구들, 조언자들, 안내자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을 성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고통과 힘든 시간은 빈첸시오 성인이 자신의 가난을 깊숙이 체험하고 연민의 하느님 –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회심
1617년 마담 드 공드의 요청에 따라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드 공드 가문의 영토 안에 있는 소작농들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폴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죽어가는 사람의 고백성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자신이 만약 그 곳에 가지 않았다면 이 죽어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그를 사랑하셨는지 또 그를 용서하셨는지를 알지 못한 채 비탄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이 주님을 알기 위해서 좋은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가 수년간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가난한 이웃들, 농부들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 차츰 차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는 당신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보내려고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순명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하느님의 종이 되시고자 순명 하는 순간 성인을 괴롭혀왔던 모든 의심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 샤티옹 레 동브라는 마을로 가셨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리용 근처의 샤티옹이라는 마을의 교구 사제로 불러주셔서 가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주일 미사를 위해 제의를 입고 있을 때 한 고립된 집에 식구들 모두가 병이 들어 있고 극심한 가난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잊지 않고 사랑의 실천에 대해 강론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강론을 들은 신자들이 그 힘든 이웃들에 대해 연민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에는 빈첸시오 성인과 그의 삶이 어떻게 사명으로 전환되어 갔는지에 대한 비밀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담고 있습니다. 우선,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직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 작은 마을로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인을 그 곳으로 부르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졌습니다.”라는 문장 속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성인께서 그 가난한 가족들에 대해 강론을 하실 때 머리로 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한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성인께서 강론하실 때 그 분의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셔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을 보는 듯 했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인양 느껴졌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러 가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에 연민을 자아내게 하셨으며 선량한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인께서는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규칙적인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인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선량함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617년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돕기 위해 자선 부인회를 샤티옹에서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
빈첸시오 성인께서 사제서품 17년이 지난 후 36세에 자신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하기로 순명하시면서 신앙에 대한 의혹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사랑의 사도’가 되셨습니다. 1625년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전교회’를 창설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빈첸시오 성인에게 수년간 고통의 시간을 통해 사랑을 배운 루이즈 마리악 수녀님을 보내셨습니다. 두 분이 함께 보건, 교육, 사회사목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자신들을 봉헌하는 ‘사랑의 딸회’를 설립하셨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난민들, 걸인들,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 고아들과 같은 모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치유하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43년 동안 보살피셨습니다. 1660년 9월 27에 선종하셨으며, 교회는 성인을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본문
학습목표
이 과목을 학습한 후에 여러분은
(1)빈첸시오 성인의 사제직을 더 잘 이해하고
(2)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는 빈첸시오 성인의 부르심을 더 잘 이해하고
(3) 복자 프레드릭의 결혼소명을 더 잘 이해하고
(4) 빈첸시오회를 설립한 복자 프레드릭의 소명을 더 잘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기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 1:18)
소개:
각 단원을 돌아가면서 천천히 묵상하듯이 소리 내어 읽는다.
빈첸시오 성인의 소명
어린 시절부터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했습니다. 그 당시 사제직은 출세와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에 소명이라기 보다 일종의 직업선택이었습니다. 19세에 서품을 받았으며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록을 얻어 조기 퇴직을 희망하는 야망이 큰 젊은 사제였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마거리트 여왕 황실 법정의 담당 사제직을 얻어 파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일이 순조로워 마침내 유럽의 가장 유명한 가문중의 한 가문인 공디 가문의 담당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공디 가문의 방대한 지역을 방문하곤 했는데 폴빌(Folleville)을 방문하다가 우연히 한 죽어가는 사람의 고백성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교구에서 고백성사 담당을 하다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샤티옹 레 동브(Chatillon-les-Dombes)라고 하는 작은 마을로 가서 가정방문을 통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최초의 자선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당시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영혼의 어두운 시절을 겪고 있었고 만약 하느님께서 이 어두움을 없애주시면 자신의 전 생애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로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즉시 성인의 고뇌를 없애주셨으며 다시는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된지 17년 후 빈첸시오 성인께서 36세 때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찾았습니다. 성인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잠시 묵상 하시고 마음에 와 닿은 단어/문구에 밑줄을 긋고 빈 공간을 이용해서 필기하십시오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소명
프레드릭 오자남은 매우 신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으로서 그의 부모님은 하느님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젊은 시절 리용(Lyon)에서 살 때 프레드릭은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신앙을 되찾아 주신다면 자신의 삶을 진리수호를 위해 봉헌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신앙에 대한 회의가 사라지면서 프레드릭의 믿음은 더욱 공고해졌고 일생 동안 자신의 서약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프레드릭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파리로 갔습니다. 그 당시 파리에는 반 가톨릭과 반 성직주의 분위기가 팽배하였는데 프레드릭은 임마누엘 베일리의 지도하에 있는 역사연구회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역사연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교회와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을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보여보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프레드릭은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의 나이 20세인 1833년에 6명의 젊은 학생들이 임마누엘 베일리와 함께 자선 협의회를 만들었으며 이로써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는 사제의 소명을 생각했었고 그 후 수년간의 식별의 고뇌를 거쳐 프레드릭은 평신도로서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8세 때 아멜리 술라크로아(Amelie Soulacroix)를 만나 1841년 6월 23일 결혼을 하였습니다. 4년 뒤 외동딸 마리(Marie)를 얻게 되었으며, 프레드릭은 혼인성사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은 결혼생활과 가족에 대한 헌신은 물론이요 빈첸시오회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부르심을 실천하는 조화의 은총을 부여 받았으며 평생 동안 이 은총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잠시 묵상 하시고 마음에 와 닿은 단어/문구에 밑줄을 긋고 빈 공간을 이용해서 필기하십시오
나눔:
여러분들의 “소명”에 대해 나눔을 해 봅시다. 빈첸시오 성인 및 복자 프레드릭의 소명과 여러분들의 소명의 연관성 혹은 유사성 등이 있는지 말해 봅시다.
마침기도: 뉴먼 추기경님의 말씀을 기도로 함께 바칩시다.(미국이사회 활동지침서 3쪽)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실제적인 봉사를 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저는 저만의 사명이 있습니다 – 그 사명을 이 세상에서 알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 저는 제 사명에 대해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대한 하느님 사업의 일 부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큰 체인의 이음새이며,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창조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선한 일을 할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이고, 평화의 천사가 될 것이며, 진실로 제가 사는 곳에 진리를 전파하며 오로지 하느님 계명을 지키며 저의 소명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겠습니다. 아멘”
심화독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가지 전에 읽어 주십시오.)
빈첸시오 성인의 소명 이야기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프랑스 남서부 작은 마을인 푸이(Pouy)에서 태어나셨습니다. 6째 중 3째 로서 3명의 남자형제와 2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소작농 계층으로서 가족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셨습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가족들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영리하셨기에 부모님께서는 사제로 만들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제는 소명의식이라기 보다는 괜찮은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사제가 되면 명예와 부가 보장되므로 나중에 가족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제직
성인의 부모님께서는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황소 2마리를 파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농부 가족에게 큰 희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인께서는 신학교에 가셨고 1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공부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하고 설득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서품은 다른 분들 보다 5년이나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야망이 큰 젊은 사제로서 성공해서 교회에서 직위를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돈을 마련해서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가족들을 돕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파리
사제 서품 후 8년이 지난 27세까지도 교회에서 받는 혜택이 거의 없었습니다. 성인께서는 프랑스 남부를 떠나 좀 더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 파리로 옮겨가셨습니다. 몇 년 안에 프랑스 여왕 법정의 담당사제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가장 부자이며 영향력 있는 가문중의 하나인 드 공드(de Gondi’s)가의 가정교사이며 담당사제가 되었습니다.
성인의 나이가 33세가 되고 사제로서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고 직위와 영향력 면에서 보장받았다고 생각하셨을 때 도둑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죄가 없다고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사건은 즉시 판결을 받았기에 너무나 치명적이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온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인께서는 자신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당시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믿음이 흔들리는 시기를 거의 4년이나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성인께서는 이해를 못하셨으나 하느님의 섭리가 성인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인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영적 친구들, 조언자들, 안내자들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을 성인에게 보내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고통과 힘든 시간은 빈첸시오 성인이 자신의 가난을 깊숙이 체험하고 연민의 하느님 –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회심
1617년 마담 드 공드의 요청에 따라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드 공드 가문의 영토 안에 있는 소작농들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폴빌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한 죽어가는 사람의 고백성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인께서는 자신이 만약 그 곳에 가지 않았다면 이 죽어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그를 사랑하셨는지 또 그를 용서하셨는지를 알지 못한 채 비탄 속에서 죽어갔을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가난한 이웃들이 주님을 알기 위해서 좋은 사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가 수년간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가난한 이웃들, 농부들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 차츰 차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는 당신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보내려고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순명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하느님의 종이 되시고자 순명 하는 순간 성인을 괴롭혀왔던 모든 의심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 샤티옹 레 동브라는 마을로 가셨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리용 근처의 샤티옹이라는 마을의 교구 사제로 불러주셔서 가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주일 미사를 위해 제의를 입고 있을 때 한 고립된 집에 식구들 모두가 병이 들어 있고 극심한 가난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졌습니다.” 그래서 잊지 않고 사랑의 실천에 대해 강론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강론을 들은 신자들이 그 힘든 이웃들에 대해 연민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단순한 이야기에는 빈첸시오 성인과 그의 삶이 어떻게 사명으로 전환되어 갔는지에 대한 비밀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담고 있습니다. 우선, 빈첸시오 성인은 사제직은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 작은 마을로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인을 그 곳으로 부르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슬퍼졌습니다.”라는 문장 속에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성인께서 그 가난한 가족들에 대해 강론을 하실 때 머리로 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온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한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습니다. 성인께서 강론하실 때 그 분의 마음이 너무나 투명하셔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들의 얼굴을 보는 듯 했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인양 느껴졌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그 가족들을 직접 만나러 가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에 연민을 자아내게 하셨으며 선량한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인께서는 도움을 주고자 하는 사람들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규칙적인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성인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선량함에 대해 믿음과 신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617년에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돕기 위해 자선 부인회를 샤티옹에서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
빈첸시오 성인께서 사제서품 17년이 지난 후 36세에 자신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헌하기로 순명하시면서 신앙에 대한 의혹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성인께서는 ‘사랑의 사도’가 되셨습니다. 1625년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전교회’를 창설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빈첸시오 성인에게 수년간 고통의 시간을 통해 사랑을 배운 루이즈 마리악 수녀님을 보내셨습니다. 두 분이 함께 보건, 교육, 사회사목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자신들을 봉헌하는 ‘사랑의 딸회’를 설립하셨습니다.
빈첸시오 성인께서는 난민들, 걸인들,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 고아들과 같은 모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치유하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43년 동안 보살피셨습니다. 1660년 9월 27에 선종하셨으며, 교회는 성인을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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