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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영상자료<제5부 빈첸시안의 회칙-제1과 회칙은 우리의 소명을 정의한다.> (영상은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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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6회 작성일 18-08-2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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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빈첸시안의 회칙] 제1과 회칙은 우리의 소명을 정의한다.

제5부 제1과: 회칙은 우리의 소명을 정의한다.

 

학습목표

이 과목을 학습한 후에 여러분은;

회칙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빈첸시오회의 기원, 목적과 전망에 대한 식별
가난한 사람들과의 개인적 만남을 가지라는 부르심에 대한 이해
 

시작기도: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은총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 1:6-9)
각 단원을 돌아가면서 천천히 묵상하듯이 소리 내어 읽습니다.소개

오늘날, 우리회의 창설자들의 정신에 충실하게 우리 빈첸시안들은 2003년 승인받은 새 회칙 안에서 우리가 받은 하느님 선물인 사랑의 불꽃을 다시 태우는 책임과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여정을 안내해 줄 복음적 교훈을 예수님께 구합니다.  신약성서는 전 교회에 가르침을 주는 한편,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떻게 능력들을 사용할 지에 따라 각 개인의 여정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3세기 초에 특별한 소명을 가진 믿는 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공동체들은 “회칙(Rule)”이라고 부르는 서로 동의한 수도 규칙 하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550년경에 쓰여진 성 베네딕도 회칙으로서 서구교회의 모델입니다

베네딕도 회칙 이후에, 교회의 주요 수도회 창설자들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도미니크, 로욜라의 이냐시오, 빈첸시오 아 바오로 등이 자신들이 설립한 공동체를 위해 “회칙”을 만들었습니다.  이 “회칙”은 그들의 경험과 삶에서 나온 것으로 단체 설립자들이 자신들의 소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느낀 진실함, 신실함, 책임감을 위한 영성, 전통, 조직, 규칙에 대하여 정의하였습니다.

성장하고 있던 평신도단체인 빈첸시오회 설립자들도 그들의 새로운 조직의 사명을 정의할 필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빈첸시오회가 설립되고 2년 후인 1835년, 임마뉴엘 베일리가 프랑수아 랄리에에게 교회의 다른 조직들이 만든 “회칙”과 같은 형태로 빈첸시오회의 영성, 조직을 설명하는 일을 맡아 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제는 전세계 5개 대륙 150개국에서 100만명의 빈첸시안들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회칙”이 새롭게 개정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로 오늘날 빈첸시안의 가슴과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우리의 새 회칙이 마련되었습니다.

 

회칙, 제1부- 제1장

빈첸시오회의 창립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새 회칙으로 기도하며 이 말씀들이 당신의 가슴에 스며들게 함

 

빈첸시안으로서, 우리는 국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이며, 가난한 이들과 교회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님의 열정과 사랑의 증거자로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 개인을 찾아가 만나서 희망으로 봉사하며 헌신해야 합니다.

 

빈첸시안으로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어떤 개인적인 형태의 도움이라도 제공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적인 품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고통이나 결핍을 경감하도록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배척 받는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빈첸시안으로서, 우리는 설립자들의 정신에 따라, 변화되는 세상에 적응하고 쇄신하는 부단한 노력으로 사회에서 배척받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웃들에게 최우선적으로 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칙으로 기도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의 통로입니까?

우리의 약점과 나약함을 알고 있습니까?

사랑, 온유함, 화해, 내적평화를 키우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회칙으로 기도하며 우리는

가정방문을 하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고 기쁘게 섬깁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엄성을 느끼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대상자의 비밀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까?

신뢰와 우정을 기반으로 관계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까?

 

(조용히 회칙 11쪽에서 25 쪽 까지를 읽으십시오)

 

나눔: 개정 회칙 제1부 -제1장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마침 기도(다함께)

오 주님, 저희에게 새로운 회칙에 따라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와 성실함을 저희에게 허락하소서.  성령안에서 성장하고,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안에서 살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섬길 수 있도록 은총을 주소서.  우리 빈첸시안들이 당신의 한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심화독서:  (기도 및 묵상용)

 

우리회의 설립자들

개정 회칙은 빈첸시오회의 창립기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전 세계에 널리 퍼진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 1833년 파리에서 젊은 가톨릭 평신도 청년들과 그들의 조언자 역할을 맡은 장년의 베일리(Bailly)에 의해 설립되어 초대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 대한 모범적 헌신의 선례를 보여준 모든 초대 회원들을 빈첸시오회는 감사의 마음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빈첸시오회 창립의 첫 영감을 받은 르 타일랑디에(Le Taillandier)와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Blessed Frederic Ozanam), 폴 라마슈(Paul Lamache), 프랑수아 랄리에(François Lallier), 쥘 드보(Jules Deveaux), 그리고 펠릭스 끌라베(Félix Clavé)는 엠마뉴엘 베일리(Emmanuel Baily)에게서 조언과 도움을 겸손히 구했으며 베일리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초대 총회장이 되었다.”(1.1))”

 

우리는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과 함께 각자의 재능과 능력으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설립을 함께 한 설립자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베일리 (1794-1861): “초대 총회장 및 영적 지도자”

임마누엘 베일리는 프랑스 북부 Pas de Calais에서 출생했다.  곧 파리에 정착하였으며, 저널리스트, 편집인, 출판인으로 일했다.  자녀는 6명이며, 그의 부인은 시도니(Sidonie)였고, 자녀들 중 2명이 수도원 생활에 입소하였다.  일생 동안, 임마누엘 베일리는 그가 만난 젊은이들에게 대부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만나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역사학회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프레드릭과 그의 동료들이 “당신들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들이 하는 일을 보여주면 우리가 믿어주지.”라는 사람들의 도전을 받았다.

그래서 오자남과 그의 친구 5명이 자선활동을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베일리에게 찾아온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베일리는 그들에게 회의장소를 제공하였고, 그들의 생각을 정리하도록 격려하였으며 영적지도자가 되면서 그들의 노력을 지도해 주는 데 동의하였다.  빈첸시오 성인을 매우 흠모하고, 성인의 저술을 잘 알고 있어서, 베일리는 자선협의회의 설립자들을 사랑의 딸회 로잘리 랑뒤 수녀에게 보내어 위대한 빈첸시안 영성 가족과 연결시켜 주었다. 1844년 베일리는 총회장에서 물러났으나 1861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사회 회원으로 봉사하였다.

 

아우구스트 르 타일랑디에르(1811-1886): “최초로 영감을 받은 사람”

아우구스트 르 타일랑디에르는 노르망디 루벤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17세기 이래 그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그가 법률공부를 계속하도록 파리로 이사를 갔다.  파리에서 그는 오자남을 만났고,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역사학회에 가입하였으나 실제로 침묵의 증거자였고, 다른 친구들을 사로 잡았던 토론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1833년 그는 오자남에게 말로써 논쟁해봤자 이득이 없으니 역사, 문학, 철학에 관한 토론 대신에 자선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최초로 영감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초대협의회에 활발히 참여하였고, 급사들에게 교리수업을 시키거나 죄수들을 방문하는 등의 다른 자선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고향인 루벤시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프랑스 최고 유서깊은 보험회사중의 한 곳의 지역장이 되었다.  루벤지역에 협의회를 창설하였으며, 회장이 되었다.

 

폴 라마쉬(1810-1892): “열정적인 정의 수호자”

폴 라마쉬는 노르망디 성 피에르 엘리제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노르망 귀족 가문의 친족으로 토지소유인이며 경영자 가문의 일원이었다.  폴 라마쉬는 법률공부를 위해 파리에 정착하였다.  1832년에 오자남을 만났고 역사학회에 가입하였으며 그곳에서 열띤 토론에 참가하다가 나중에 자선협의회에 참여하였다.  법률공부를 마친 후, 결혼을 하였다.  그는 다양한 풍자극에 많은 기고를 하여 당시의 열띤 토론에 참가하였다. 노예제도를 강력히 반대한다고 직접 선언한 최초의 가톨릭 작가였다.  그는 교육의 자유를 지원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는 브리타니 코테스 두 노르드 아카데미(Departmental Academy in the Cotes-du-Nord(Brittany)의 학과장이 되었으며,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의 로마법 교수였고, 보르도와 그레노블의 행정법 교수를 역임하였다.

 

프랑수아 랄리에(1814-1886): “회칙을 최초로 만든 사람”

프랑수아 랄리에는 브루군디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법과대학에서 오자남을 알게 되었고 오자남이 죽을 때까지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으로 그와 함께 하였다.  또한 오자남은 그를 자신의 딸, 마리의 대부로 정했다.  그는 역사학회의 토론에서 가장 열심인 참석자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베일리와 파리대교구 교구장님과 함께 빈첸시오회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1835년에 베일리는 그에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칙을 만들도록 위임하였다.  그는 명쾌한 논조의 사용과 활동으로 유명한 법률가였다.  1837년에 빈첸시오회 총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빈첸시안의 중요한 전통인 회람의 발행인이 되었다.  1839년에 총회장직에서 물러난 후에, 결혼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 살며 판사로 일했다.

 

쥘 드보(1811-1880): “초대 협의회 재무관”

쥘 드보는 노르망디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소작농 집안의 시골의사였다.  1830년에 그는 의학공부를 마치기 위해 파리에 정착하였다.  파리에서 오자남과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역사학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학회에 참석은 하였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었다.  그는 빈첸시오회 설립의 초기 회합에 참석하였다. 그는 협의회 초대 재무관이었다.  의학실습을 마친후 1839년에 파리를 떠나 특별히 독일을 여행하였다.  그곳에서 최초의 협의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으나 연기되었다.  나머지 그의 삶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880년에 파리에서 그는 생을 마감하였다.

 

(펠릭스 끌라베(1811-1853): “빈첸시오회 설립자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

펠릭스 끌라베는 뚤루제 출신으로, 1831년에 파리에 정착하였다.  그가 한 공부는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교육받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태생보다도 더 나은 사회적 환경과 교류하였다.  그는 오자남 친구들과 사귀었으며 베일리와 연락을 한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자선협의회 회합에 참석하였다.  그 자신이 직접 살고있던 파리 지역에 협의회를 창설하였다.  알제리로 근무하러 떠나서 그곳에서도 협의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839년에 알제리를 떠나 그의 처남이 살고 있는 멕시코로 갔다.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결혼을 하고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시집이었다.  결국은 그의 예민한 신경쇠약 때문에 부인과 헤어지고 그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42세 때 오자남이 사망한 지 2달 만에 그도 사망하였다.

(전기기록은 Origines et fondateurs de la Societe de Saint-Vincent de Paul에서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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