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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용서, 의로움을 따라감(2020.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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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29회 작성일 20-07-30 11:09

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았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입을 막으면 말을 못하고, 눈이 닫히면 보지 못하고, 귀를 막으면 듣지 못합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바라봄과 들음을 통해서 자라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듣고 보고 그리고 생각한 것을 말하게 됩니다. 모든 경험은 말로 전해지고 그 다음 글로 기록되게 됩니다.


상대에게 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마!"

또는 "아니야 용서할 수 없어" 이렇게 각각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한다." 말을 하면, 용서하는 것이 되고, "용서할 수 없어!"하게 되면 용서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말의 용서한다. 또는 용서하지 않는다. 는 것에 따라서, 그의 허물과 죄의 사함이 결정됩니다.

용서에. 그 용서가 갖가지 경우로 이해되고 전달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용서하라. 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하라고. 합니다. 또 다른 경우겉으로는 용서했어도, 법적인 책임까지 질 때 용서하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용서의 포괄성, 전체성이 있습니다. 용서를 궁극적인 용서로 표현합니다. 근본의 용서로 나타냅니다.

  "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마태 6,14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9,22


  그런데 루카 복음은 용서에 대한 실천적 가치를 중시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카 17,4


  루카 복음사가의 용서관은 곧바로의 용서가 아니라 죄의 꾸짖음과 회개 이후의 용서를 말합니다. 곧 죄에서 선으로의 탈바꿈, 정개(定改)를 요구합니다.

 용서가 포괄적 용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죄와 잘못의 방향전환, 회개와 정개을 통한 용서를 말합니다.

 

  매정한 종이 비유에서 임금은 일만 탈렌트 빚진 자의 일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해 주는 데, 그는 동료의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진 않는 이야기에서, 임금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9,33). 용서는 타인을 용서하는 것 뿐 만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온전한 용서를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9, 23)

  다시 말하면, 루카의 용서관은 상대를 단지 무조건, 포괄적 용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죄와 잘못을 밝히고, 그 그 드러난 죄의 회개로써, 용서해 줄 때 궁극적 죄의 용서임을 말합니다.

 

  무릇 왜 내가 용서하기가 힘들지? 용서해야 하는 데, 못하는 나를 책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용서는 그의 죄의 규명과 그의 회개를 통해서 궁극적 용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또한 그가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느님 앞에 바로서고, 그분 안에 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에서 나의 우려를 멀리 치워 버리기 바라니다.  단 용서의 자비와 사랑의 마음은 유지하십시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았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용서는 죄를 꾸짖고, 회개하면 용서하는 규명의 용서의 길을 생각합니다. 그런 용서가 참 용서이고, 그나 나나 똑같이 하느님 앞에, 그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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