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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용서, 무지를 앎으로(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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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17회 작성일 20-06-11 09:29

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성장하지 못한 채 어미를 떠난 새기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눈길에서 길을 잃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진리를 벗어나면 이룰 수 없습니다. 앎을 없으며 무지의 암흑이 덮치게 됩니다.

 

 내가 상대를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용서한다는 것은 '이해'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가 나를 불편하게 하고 힘이 들게 합니다. 그가 조롱하고 배척할 뿐 아니라, 여럿이 음모까지 꾸밉니다.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지도, 악한 것인지도, 또 죄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 그는 줄곧 그런 잘못된 행위를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상대를 헐뜯고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즐기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다면 어떨까요? 그가 바르고 선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요? 그에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용서에는 용서 이전의 '이해'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해보다 '해석'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상대의 행위가 바르지 않고 그릇되었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그것이 지속되는 것은 그의 삶 안에 인생의 여정에 '무지'라는 굳고 차디찬 바위같고 쇠같은 장애물, 걸림돌이 존재합니다. 

 

  그릇된 것을 바르다고 생각하고, 정당하지 않은 것을 정당하다고 하고, 잘못된 판단을 바른 판단이라 하고, 몰염치한 것을 평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의 앎의 시절에, 앎의 시대에 그 앎. 그 지식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식견을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행사하는 것. 그것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그에게는 식견과 분별이 아주 미약한 것입니다.

 

  그가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행위가 그릇된 폭력임을 알지 못하는 것. 과거의 자신의 불편함이나 괴로움을 치유받지 못한 것. 자기가 받은 힘의 고통이 회복되지 못한 인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다른 이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며 폭력을 행사함으로서 상처받고 소외된 자신을 보상받고자 합니다.

 

  그가 지식이 있다거나 영예가 있다거나 건강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무엇인가.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오로지 '무지'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참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생이 의미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 은혜와 축복을 알지 못합니다.

 

  비근한 예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아드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 많은 말을 듣고도 알아듣고 식별하지 못했고, 결국은 그분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과 율법에 정통하고, 성서 말씀에도 해박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무지'는 악행으로 예수, 그분을 죽이는 데 끝까지 찬동하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는 것. 용서의 당위성 앞에서 우선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과거로부터 온 무지와 그 힘들게 살아온 소외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상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내게 입힌 피해가 먼저 생각이나고 감정적인 불편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렇지만 그들은 지식을 알아야 하고,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길을 알아야 할 시기에 그 시기를 놓쳤고, 자리를 놓쳤고, 부모와 그 멘토를 놓쳤습니다. 과거 그들이 어린 시절 그들이 자신을 조절하지 못한 시기에 그런 평화의 품성을 얻지 못하였다면, 그들의 잘못보다 그들의 부모나 가족, 함께 있던 가족과 공동체의 무지가 자리잡습니다.

 

  무지는 옮겨가고 또 옮겨 갑니다. 그것이 전승이 됩니다. 지식도 전승이 되지만, 무지도 그렇습니다. 그 무지가 암흑이라면 그는 얼마나 가련하겠습니까?

 

  용서의 당연성 이전에 그가 이미 무지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는 대로, 그의 무지를 깨우치는 데 에너지를 보태기 바랍니다. 그의 무지가 풀려나고 해소될 때, 그는 진정한 자유를 얻고 그는 행복해 집니다. 주님은 무지를 해방시키고, 평화로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목요일 성령을 받아라. 그의 죄를 용서하면 그가 용서를 받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씀. 그의 무지를 알고, 깊이 묵상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 무지를 해소하는 데 함께 하는 것. 용서로 나가는 길입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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