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점진적 건강한 노력을(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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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21회 작성일 20-03-12 10:07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14, 6
사람은 태어나고, 기름을 받고, 배웁니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또 알고 배우며 더 나아가 배움이 배가가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온 걸어옴이 있습니다. 인간사의 성장 과정 안에 그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살아온 그 걸음만큼 역사적 여정과 내용이 있습니다.
부모나 보호자로 부터 돌봄을 받고 가르침을 받고 걸어오지만, 걸어옴 모든 과정이 늘 좋고 즐겁고, 바른 곧 건강함만이 아닙니다.
부모나 보호자의 가르침과 기름도 있지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인지라, 사회의 각 구성원을 통하여 돌봄과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실상 가족의 구성원이지만, 부모의 자식들이지만, 꼭 혈연의 가정의 일원만도 아닌 것입니다. 그는 이미 사회적 가족의 일원입니다.
만일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나는 오로지 이 집 가족이야, 자녀야, 이 집 식구야!' 한다면, 그것은 가족의 사회적 길과 가르침그 가치를 잘 식별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실상, 부모가 있는 가족의 자녀가 통상적으로 건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가 없는 자녀라고 해서 건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부모없이 자랐다 하더라도, 바르게 성장했으며, 사회의 건강한 리더가 많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가정의 전통, 부모의 교육이, 공동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맞기는 하지만, 꼭 올바르다고 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유훈이 있고, 정돈된 집안이라고 해도, 남아늘 여아보다 우선 한 경우가 있었고, 큰 남아를 우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을 우선할 뿐 만 아니라, 대화나 관계에서도 상대적 우위에 둠으로서 딸 자식들이 차별을 느끼고 우울하게 살 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도, 집안에서 한쪽 자녀에게 편향하고, 편들고, 지지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호 공평하고 존중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이 아닌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난 날 내 가족이 전부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건강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가정 종교 생활에서 윤리적 도덕적인 것은 맞지만, 사회적 공동체적인 면에서는 미숙하고 그 수위에 못미칠 수 있습니다. 지역적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내 지역 지연 의견에는 찬동을 하지만, 선과 정의에 상관없이 다른 지역과 지연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가정을 보면 자기 자녀 가족 사랑은 짙은 데, 다른 가족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매우 미숙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녀에게 진한 애정을 보이면서도, 다른 가족 자녀들에게는 사랑을 커녕, 상대적 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기 가족과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을 100%, 그 이상을 주면서도, 다른 가족과 자녀들에게는 털끝만치도 내어놓지 않은 가족들도 있습니다.
곧 자기와 자기 자녀, 자기 가족에게는 모든 것을 투자하고, 헌신하면서도, 다른 가족 다른 사회적 가족들에게는 인색합니다. 나와 타인의 관계를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은 공동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비도 그렇습니다. 선함도 그렇습니다. 공동의 선이어야 합니다. 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의 정의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동의 가족, 정의를 말합니다. 평화도 모두의, 공동의 평화를 말합니다.
용서를 말할 때, 내가 가정에서 돌봄과 가르침을 받는 것에 따른 용서의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좀더 용서는 공동의, 공동체의 용서를 말해야 하고, 그 차원으로 넓혀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용서를 가르치면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다른 가족과 다른 대상들을 만날 때 용서하지 않는 사회적, 공동체적 대상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용서를 개인의 미시적(微視的), 지엽적(枝葉)으로 바라봅니다. 용서는 나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너와 우리, 공동체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말할 때, 다른 가족의 용서를 실현하는, 용서의 정의로움을 말해야 합니다. 자녀가 성장해서도 가족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다른 이웃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용서를 인지하고 생각할 나이와 세대에 용서에 대한 공동의 식견을 갖추지 못한 때문입니다.
용서는 공동의 정의에 따라 용서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공동의 사랑에 따라 용서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공동의 선과 진리에 따라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용서을 알고 배우고 깨달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앎과 식견이 필요합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용서하고, 타인 가족에 대한 상대적 격리와 이기심, 용서하지 못함은 용서의 이룸에서 매우 미약한 것입니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용서는 나와 가족의 용서를 넘고, 모두, 모든 가족의 용서를 향해 가고, 그렇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공동의 용서입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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