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정의와 공정과 함께(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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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42회 작성일 19-11-14 10:14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14, 6
상대의 죄를 용서하면, 상대. 그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습니다.
어떤 이가 내가 아닌 다른 동료에게 잘못했을 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를 꾸짖는, 책(責)하는, 강도가 낮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슷한 행위로 내게 불의하거나 잘못했을 때, 나의 꾸짖음의 강도는 훨씬더 크고 거셉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제서야 내가 입은 피해를 깨닫고서, 그에 이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는 불의하게 행동하고 잘못한 사람에 대한 용서입니다. 실상 상대는 줄곧 그런 가치로서 그릇된 행동을 해 왔기 때문에 쉽게 고치려고 하지않고, 고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 참으로 용서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찌 그의 그릇된 행동과 잘못을 이해하기도 힘이 드는 데, 그를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의당히, 그가 자기의 그릇됨을 알고, 잘못을 알고 용서를 청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용서를 위한 금상첨화)(錦上添花)이겠지만, 오히려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호도(糊塗, 진흙을 푸는)한다면, 어찌 그를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구나 그의 그릇된 행동과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는 힘이 세고, 그 힘을 이용하여 불의를 저지르고, 그릇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힘이 세어 강권을 부리는 사람의 죄와 그릇된 행동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인가? 정의와 공정이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인가? 그것은 그릇된 폭압에 대한 눌림이고, 자세히 보면 나의 비굴함일수 있다. 내게도 정의와 공정이 부족할 뿐 아니라, 나의 비굴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용서라는 단어, 그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공정과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용서라는 것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회개와 반성, 참회과 개선에 대한 노력을 통한 용서입니다.
내가 그릇된 행위와 악행을 쉽게 인정하고, 또 악행과 행위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의 악행도 문제지만, 나도 그런 그릇된 행위와 악행에 연루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도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 평화와 생명의 생활에서 멀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신자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 정신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강권으로, 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그런 그릇된 행위를 하는 이들, 악행을 하는 이들은 선한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와 물리적을 대결해서 승리할 수 없고, 자칫 잘못하면 생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그런 그릇된 권세행위에 대해 물리적 대항이,절망적 상활을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진리를 잊지 않고, 정의와 공정을 잊지 않고 항구하게 기다리는 시간, 기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도와 함께, 정의의 하느님, 능력의 하느님께 항구히 기도하며, 인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 역사(役事)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역사에서 악한 자들까지도, 그 심판과 함께 일을 이루시며, 또한 끝내는 모두의 용서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용서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십니다. 용서는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이 함께 어우러지는 용서입니다. 단지 용서한다는 것은 나의 비겁함과 생의 부끄럼일 수도 있습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14, 6
용서는 선과 진리를 포함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자비를 포함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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