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무지를 지식으로(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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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13회 작성일 19-07-18 09:33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미물들도 습관이 사뭇 다릅니다. 모든 생물들이 그렇습니다.
서방에 모기가 자리하는 것을 보면, 어떤 것은 천장에, 어떤 모기는 벽에, 어떤 것은 낮은 곳에, 어떤 것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게 됩니다. 노출된 곳을 즐겨하는 것도, 구석진 곳을 선호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모기들이 그렇게 습성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각기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습성도 다릅니다. 그것이 천부적이기도 하지만 후에 습관화된 것도 있습니다.
새끼가 알을 깨도 나왔을 때, 알 속의 세계와 밖같 세계는 전혀 다릅니다. 알에서는 모든 것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었지만, 밖같 세상은 그를 늘상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새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나서야 하고, 또 성장해야 합니다. 주변의 사물과 동식물들을 만나고, 또 관계하면서 공격하고 공격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태중에 있을 때와 세상에 나왔을 때의 환경과 조건이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누가 상처받고 살기를 바라고, 누가 고통 중에 살기를 바라는 이가 어디 있을까요? 빈곤과 가난, 병고와 아픔, 곡절과 굴절 환경에서 살고하 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각양각색 사람들이 처지와 환경, 조건과 생활이 각각 다르고, 각자가 갖는 소외감이 다릅니다. 누구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소외감으로 하여금, 사람은 긍정보다 부정에 더 민감하고, 부정적인 만남과 상황에 부딪치면, 긍정의 생활을 쉬이 잊어버리고 놓치고 맙니다. 그러면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되고, 회한과 후회를 하게 되고, 불평과 불만, 어떤 경우는 욕설을 퍼붓고 공격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긍정보다는 부정을 더 알고 있고 부정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자기에게 피해가 올 것 같으면 부정의 기제(機制)를 드러냅니다. 부정의 방법으로 가격하고 공격합니다. 긍정보다 부정을 더 선호합니다.
이런 면에서 용서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게 잘못을 하고, 우리, 공동체, 사회에 잘못을 했을 경우,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게 됩니까? 용서와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그의 잘못, 부끄러움, 악습, 죄까지 포함하여 그가 그런 행위를 했을 경우, 없던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과거. 그에게 있던 것이 나타난 것입니다.
왜 과거에 그에게 그런 요소가 있었을까요? 그 소외되고 굴절된 요소가 있는 이유는 그의 어떤 시대. 어린 시대 등에서 그런 소외와 굴절의 시간과 장소, 상대와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역사에서 그런 소외와 굴절의 조건과 환경과 경험과 대접이 제대로 규명되고, 회복되고 그리고 치유되지 않으면 그것들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소외 역사와 가치가 나, 너, 우리, 공동체, 사회, 나라와 민족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그의 소외되고 굴절된 과거의 역사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의 잘못과 부끄럼, 죄와 악행은 이미 과거의 그가 만났던 사람과 대상 그리고 그 환경에서 그것을 통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역사로 진행된 그것을 곧 그런 굴절된 소외된 행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편 너,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죄와 잘못을 용서하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이전, 그 웃대의 사람들과 대상들을 용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죄의 사슬을 하나하나 끊어가는 역사(役事)가 있습니다.
실상 그 사람이 그런 잘못죄고, 죄스런, 그리고 악행을 일삼는 것은 그가 그 잘못과 죄를 알았다기 보다, 오히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짓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자기의 무지로 죄를 짓는다.
자기의 부끄러움과 허물을 알지 못한다.
무지가 죄를 낳는다. '
용서, 내가 용서하는 것은 그의 추하고 악한 것을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무지, 죄와 악까지도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무지를 용서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지를 용서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는 지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무지를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무지를 지식으로 바꾸는 것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지식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얻을 수 있는 자산입니다.
그러나 그의 악행과 죄를 '무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나는 피해를 보았고, 그것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악행을 무지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의 무지를 받아들이고, 그 무지를 지식으로 바꿔주는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의 무지가 끝날 때 비로소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무지를 지식으로 바꾸어 놓는 날,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용서한다는 것. 그것은 그의 무지를 아는 것이고, 무지의 허물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무지를 지식으로 바꾸어주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일흔 일곱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그에게 참 지식을 알게하고 그 지식을 사랑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오늘 상대의 무지를 아십시오. 그 무지를 지식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십시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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