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줄임과 절제에서(2019.04.1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332회 작성일 19-04-11 09:26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용서하면 용서받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도, 너도, 그들도, 모두가 용서받아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종종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구원에서 따돌려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그릇된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내게 극심한 고통이나 좌절을 안기거나, 악행을 한 사람들 경우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그가 구원받는다면 하느님은 공정하지 않으신 분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식탁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중에 손, 입에 음식 자국이 납니다. 그러면 종이 넵킨을 쓰는 데, 어떤 이들은 여러 장을 쑥쑥 빼서 사용합니다. 한편 물을 엎질거나 음식 자국이 나면 더 많은 넵킨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줄이기 위해서 손수건을 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종이 1장만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패스트푸드 점에 가면 종이 깔판을 쓰고, 더 많은 넵킨을 사용합니다. 젊은이들도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사용하고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음식도 많이 시키고 남으면 쓰레기 통으로 직통합니다.
물론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종이를 행주대신 사용하기 때문에 편리합니다. 그러나 상대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특히 살아있는 나무 입장에서 보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프고 절망적인 일입니다. 왜냐면 종이 깔판이나 넵킨은 살아있던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를 사람들이 베어서 펄프를 여러 공정을 거쳐서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라고 하는, 사용자의 편리와 편의에 따라 상대 물건이나 물체를 사용합니다. 상대 물건이나 물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살아있는 자연이었고, 또 생물이었습니다.
나의 편리와 편의, 아무 생각없이 쓰고, 즐기고,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살아있는 자연과 생명을 손상시키고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생존하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사용하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편한 것. 이용하는 것. 즐기는 것만을, 의식이 없이 행하는 것은, 상대적 존재에게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먼저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라는 존재를 상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는 상대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 너, 우리, 모두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나만의 필요와 생활과 이익만을 바라보는 생활에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갑'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바라보는 것은 용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나'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또한 '너' 곧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공정과 정의의, 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배가 아프고 고통스럽다면 마구 밥을 먹지 않습니다. 위험에 처한 것을 알면서 그 위험 속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먹던 음식도 줄이고, 위험을 피할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정의는 스스로 줄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더 많이 말을 하고, 더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고 적절하게, 더 말하지 않고 덜함, 덜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용서에 도움이 됩니다.
절제는 줄이는 가운데 줄임의 의미를 알고, 줄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서도 '절제'의 은사가 은사 중 큰 위치를 차지합니다. 아홉가지 은사 중에 마지막에 있지만, 절제의 은사를 통해서 다른 은사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갈라 5,22-24).
용서한다고 했지만, 내 입장을 이야기 했습니까? 동시에 상대의 입장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용서하면서 나를 스스로 객관적으로 보았습니다. '나'라는 객관적 모습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를 겸손하게 하고 낮추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 입장에서 바라보고, 끝까지 아들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더 좋은 것으로 잔치까지 베풀었습니다(루카 15, 11). 아버지는 사용자 입장이 아니라, 아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용서는 나를 중심에서가 아닌, 상대 입장에서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용자인 나의 입장과 함께 상대의 너의 입장을 바라보는 것이고, 나를 줄이고 너를 배려하는 나의 절제를 필요로 합니다.
용서는 상대를 배려하는 진리의 마음이고, 과다한 나를 줄여가는 마음입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용서는 성령의 은사, 절제 덕을 갖추는 것입니다. 내 습관, 편리, 사고, 논리를 넘어 상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의 상황과 조건도 이해합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를 실제의 용서의 단계로 넘어가게 합니다.
이재을 신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