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생명을 위하여(202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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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24-03-22 09:45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존재. 생을 위해서입니다. 곧 삶이 그 끝이며 목적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깨달음도 '삶'을 위해서 입니다. 깨달음은 곧 '삶' 생명을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 생명을 살아야 하지만, 죽음에 연결하여 살고 있습니다. '생'이 아니라 '사'에 방향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말을 해야하고 또 서로 살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사람을 절망과 죽음으로 몰아넣은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살려야 하지만, 아기를 죽이는 데 마음을 먹고, 또 주위 사람들이 동참하기도 합니다. 아무 힘도 여력도 없는 아기를 없애려는 데 혈안이 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돈과 편함, 안락, 향락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사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인류, 사람들을 살리고자 당신의 귀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은 세상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속죄 제물까지 되셨습니다.
오늘날 주위를 돌아다 보면 생명의 문화가 아니라, 죽음의 문화를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즐김과 편안, 안락과 향유를 위해서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 산과 숲을 없애고, 대량의 오염 물질를 배출합니다. 차량은 더욱 더 증가하고 대형화 하고 있습니다. 대기에 오염 물질를 대량으로 내보내고 모두에게 생명의 위협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나의 편함과 즐김, 향유와 안락, 이익과 벌이를 위해서 생명의 환경을 죽음의 환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의 환경과 문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 죽음의 문화는 그 결과가 참담한 죽음과 고통입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내가 어떤 형제의 잘못과 허물을 용서하는 것도 인간적 용서이지만, 죽음의 환경, 절망과 소멸의 환경을 만든 이 세상의 죽음의 문화를 깊에 이해하고 이것을 바르게 극복해 가는 것도 사회적 우주적인 용서입니다. 그런 용서에 까지 우리의 사고와 가치과 행위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것. 너, 이웃을 용서하는 것. 사회, 창조 질서 회복에 부응하고 노력하는 것.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함과 창조와 사랑의 질서에 마음과 몸을 드려 실천하는 것. 그것이 모두 다 '용서'에 포함됩니다. 그런 용서에서 내가 용서할 때 용서의 은혜와 특은을 입을 것입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나와 우리, 세상 사람들의 용서를 위해서 당신이 생명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그 앎에서 용서를 형제와 이웃과 사회와 창조를 위해서 그 용서를 실천하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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