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진리의 적극에서(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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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44회 작성일 24-08-29 10:10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일이나, 만남의 사후에 해결하기 보다는 먼저 사전에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 상처가 나서 조금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쉬우나 상처를 그대로 놔두어서 곪거나 더 범위가 넓어지면 치료도 힘이들고 치료의 기간이 길어집니다. 우리의 잘못되거나 바르지 못한 생각이나 가치를 어릴 때 부터 바르게 세우거나 이끌었다면 어른이 된 지금 그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어른의 가치에서, 특히 바른 기름에서, 부모가 영과 육의 균형과 중용을 지키고 선과 진리의 길로 이끈다면 어린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바른 길을 가고 자기 몫을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하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올바로 서지 못하고 굴절된 삶을 살아갑니다.
어릴 때 부터 바른 멘토, 인도자, 목자, 부모가 필요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예, 잘됨과 영예를 추구하는 부모는 자녀의 진리와 선함, 균형과 중용의 가치를 흔들 수 있습니다. 그가 선과 사랑, 진리와 평화와 자기 세상의 소유에서 균형이나 중용을 이루지 못하면 그의 인생길은 험난하며, 모두로 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없고, 참담한 인생길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용서. 만남과 일의 사후에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가 사후에 내가 어쩔수 없이 그의 과실이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일방적을 가격을 당한 나로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지만, 정신적 심리적 공동체적인 압박과 고통이 쉽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용서의 상당한 치유 과정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용서가 되지 하게 되고, 예전의 아픔과 고통이 또 다신 나의 내부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아직 상처에서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후의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다거나 일부러 용서 않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적 회복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 치유와 회복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나의 존재적의 삶과 존재적 사랑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했다고 상심하는 이들이여! 내가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의 가격으로 나의 상처와 아픔이 아직 회복되거나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힘들어 하거나 아퍼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용서. 사후 용서보다, 사전 용서의 길을 위해서 평소에 준비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전 용서는 적극적인 선과 사랑과 진리의 행위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 무슨 사건에 접하고 고통이 오더라도 나의 적극적인 선과 사랑과 정의로운 삶은 설령 용서해야만 하는 순간이나 자리가 있어도, 그는 용서의 내밀한 차원을 ]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의 진리와 선 그리고 정의로움을 용서를 해결할 능력을 소유합니다.
용서함이 어려운 이들이여! 무엇보다도 오늘 부터 진리를 향해 걸어가십시오. 선을 행하고 공정한 삶을 몸소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그런 이는 용서의 사건이나 일을 풀어갈 수 있고, 궁극적 용서의 길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용서에서 그 적극적인 용서의 길로 나아갑니다. 선과 진리, 공정과 정의를 먼저 실천합니다. 용서의 적극적 삶입니다.
주님, 오늘 당신 앞에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의 삶을 통해서 용서에서 앞장서게 하소서. 용서의 사건에서 스스로 풀어가게 하소서. 그 품에서 용서를 완성하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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