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쉼의 시간이(2021.06.24)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21-06-24 09:47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사람들이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바라봅니다. 스마트 폰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그들의 손과 눈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쉴 사이가 없습니다. 눈과 손 만이 아니라 머리도 쉴 수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움직임과 바라봄에 뇌도 쉬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정보와 지식이 들어가지만, 그 정보는 얻지만 상대적 유여과 간격, 쉼을 빼앗아 갑니다.
늦은 밤을 보내고 새벽녘까지 스마트 폰이든, 정보기기 안에서 움직이고 바라봅니다. 정신과 마음의 쉼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스마트 폰을 중단할 수 없는 것. 절제할 수 없는 것. 놓아둘 수 없는 것. 절제와 멈춤을 잃어버림. 그것 자체가 정신 뿐 아니라 정서적 흠결이 생긴 것입니다.
생각의 휴식, 마음의 휴식, 육체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지식과 정보 습득도 멈춤이 필요합니다. 마음과 정신과 영적인 밭에 안정적 평화가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걸어오고 걸어가야 할 가치와 의미까지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절제와 멈춤이 필요합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으뜸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자신에게 쉼과 휴식을 부여해야 합니다. 주말에 휴일을 보낸다는 의미를 넘어서 하루에도 자주 쉼과 유여, 간격과 여백을 마련해야 합니다.
실상 지니고 살면서 계속 바라보고 조작하고 생각하고 하는 가운데, 자기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각과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한쪽의 가치와 이상만 바라보게 됩니다. 자기만의 즐김과 기분 좋은, 자기 만의 환희와 환호에 애착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스마트 폰의 지속적인 각종 정보의 공유는 현장의 관계와 대화, 경험과 생활을 점점 약화시키고, 대면과 활동의 인격적 관계망을 비웃고 무시하면서, 나눔과 자비, 정의와 진리를 지나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쉼을 선택하면서 시작됩니다. 여백을 가져야 합니다. 쉼과 여유을 위해서 절제와 멈춤을 통해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쉴 줄 아는, 그 쉼을 가져야 용서의 전망이 열립니다. 용서한다고 해놓고서 끊임없이 말하고 주장하는, 이야기의 쉼이 없이는 그것을 용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쉼이 없으면 자기를 못살게 구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들게 하고 스스로에게 힘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힘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자기를 죽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와 반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칠일 째 쉬셨다면, 우리도 그런 거룩한 쉼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쉼은 자기 자신 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고요함 중에 기도하셨으니, 그 고요한 시간의 쉼을 가져야 합니다.
쉼의 여정에 동참하십시오. 쉼을 위해서 절제하고, 또 멈춤하십시오. 스마트 폰을 중단하고 마음과 정신과 영의 쉼을 가지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용서의 대열에 동참하십시오.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22-23
용서는 여백을 갖는 것. 쉼을 갖는 것. 머리와 마음의 탈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스마트 폰을 잠시 멈추게 하십시오. 절제가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재을 신부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