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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청함, 정의의 사랑을(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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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108회 작성일 20-04-2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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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청함의 날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8


  바르게 살라, 선하게 살라, 남을 도우며 살라. 등등 말합니다. 자비를 베풀라,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합니다. 단지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게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이웃, 공동의 이웃들과 공동체에게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특히 종교의 가르침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종교가 거룩한 것은 공동을 위한, 공동의 선과 정의를 위해서 걸어갑니다.

  만일 종교인들이 자기 집단만의, 종교 자기 이념과 법만을 최우선하고, 상대나 상대 종교에 대해서 낮추거나 폄하한다면 공동의 선익과 평화를 거스릴 수 있습니다.

 

  성 마더 테레사는 병들고 고통받은 이들이 왔을 때, 힌두교도이면 힌두교식의 기도를 하게 하였고, 이슬람교도, 불교도인 경우는 각기 자기 종교 방식에 따라 기도를 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나 가톨릭이면 또한 그렇게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성 테레사는 각기 기도에서 평화를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전하고 선포하는 이들은 더더욱이 기도를 통해서, 활동과 나눔을 통해서 그 '평화'을 구하고 살도록 도와줍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서 우리는 율법의 기준이 꼭 하느님 나라의 길에 맞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넘어서 자기의 회개와 회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또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인가를 알려줍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는 유대인 바리사이인은 성전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루카 18,11-12


  바리사이는 자기가 지키고 있는 철두철미 율법의 생활이 절대적 가치를 알고 있고, 그 실천했음을 명백히 내어 놓습니다. 자기는 윤리 도덕적으로, 율법의 조건을 지키는 데서도 완벽하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당시 유다인들에게 지탄을 받던, 그들로 부터 불결로 여김을 받던, 세리는 성전에서 멀찍이 떨어져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루카 18,13


  지탄을 받던 세리가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회심에서, 진심어린 회개의 기도를 바치는 그의 기도는 한편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알려줍니다.

 

  내가 그리스도교. 가톨릭 신자라 하더라도, 율법을 준수하고 또 그 조건을 갖추는 신심생활이어도 반면에 실제적인 회개와 회심의 생활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회개와 회심이  그 생활이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과정에서 무지할 수 있습니다.

 

  종교 생활과 행위를 하고, 애덕을 실천하고 봉사한다고 하지만, 그 중심이 하느님에게 있지 않고 자기만의 중심일 수 있습니다. 율법과 법칙을 우선하지만,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는 성경의 바리사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한편 나는 종교적 신심과 활동을 하지만, 자기 필요와 이익을 위해서 신심생활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도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있는 종기 투성이의 가난한 이 라자로가 누워 있었는데,비천한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부자는 가난과 소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바랬지만 그것 조차 가능하지 않았습니다(루카 16,21).

 

  내가 종교인으로 살고, 전례와 신심생활을 하며, 봉사하고 활동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종교의 가치와 그 정의를 외면하거나 또한 살지 않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평화, 선과 공정와 동떨어져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는 하느님 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왕따 종교인입니다.

  

 한편 종교의 율법을 지키고 신심활동을 한다고 하면서도, 신실한 회개와 거리가 멀고, 또한 실제의 사랑의 행위에서 눈멀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완전한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식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청할 것. 구할 것은 내가 바라고 필요한 것만을 청하는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내가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이런 간구와 청함도 중요하지만, 진실된 회개와 회심도 간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은 멀리 계시고 내 자아와 편함이 중심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서, 근원적 쇄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애덕을 실천한다고 하지만, 허례와 허식의 애덕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허식의 애덕도 또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율법조항 만을 지키는 바리사이처럼.


월요일은 청함의 날입니다. 나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선과 평화를 진심으로 찾습니다. 그것을 청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마태 7,7-8

  청하는 것. 신실한 회개와 회심을 청합니다. 겉치레의 애덕이 아니라 진정한 애덕을 청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평화를 주는 신실한 사랑을 청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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