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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말씀-오늘의 묵상

용서, 측은지심과 자비(201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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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246회 작성일 18-08-23 10:24

본문

목요일은 용서의 날입니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14, 6

베드로는 예수님께 "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번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고 하였습니다.

일곱은 완전한 숫자인데, 일곱번씩 일흔일곱번, 오백삼십아홉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용서의 무한대, 용서에 있어서는 진정한 용서여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실상 불편하게 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기고, 피해를 주고, 잘못된 행위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 사람 등 나를 좌절과 절망에 빠뜨린 사람을 용서한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선하고 바르게 한 일에 대해서 그의 악한 행동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행위에 대한 되 갚을, 반격도 모자라 그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 잘못없이, 선한 사람으로 실패한 자로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용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에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용서 이전의 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용서 이전의 내 마음, 용서 이전의 그 사람의 마음과 여정 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대가 죄와 잘못, 악한 행위를 한 것은 그가 단지 어제나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가 나나 공동체, 사회에 한 행위는 그의 전 역사를 지배하는 과거의 모순되고 굴절된 역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이후, 그의 가족, 가문에서, 그이 살아온 역사와 행업에서 선과 진리의 따라, 사랑과 자비에 따라, 정의와 공정에 따라 살아오지 못한, 자의든 타의든, 그 부끄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여정에서 그것을 인지했든, 하지 못했든 간에 그의 인생의 역사안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나와의 관계에서,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에서, 있었던 그것이 그렇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있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의 부끄러움과 잘못, 죄와 그릇된 행위의 역사는 고스란히 그 가족과 가문에 남아있고, 그것이 어느 때가 되거나, 힘과 영예가 주어지면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상 그가 그것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그의 생활과 공동체 활동에 드러났다면 그것은 그때까지도 그에게 선과 정의, 평화와 사랑의 가치에서 치유되거나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가 지식도 힘도, 영예도, 명예도, 모든 것에 남부럽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어는 위치, 어느 장소에서 이런 부끄럽고 곡해되고 굴절된 가치와 행위가 드러납니다. 이미 있던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순간, 관계 맺는 순간의 그의 부끄러운 역사와 가치가 도드라지고,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내게 죄와 잘못을 한 것은 과거의 그의 부정적 소외의 역사가 드러난 것 뿐입니다. 그는 그런 악한 행동을 했으면서 그것 자체를 모르고, 악을 선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시대의 일부 경찰이나 역사나 정치 행정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보면 그의 후손들이 자기 부모의 부끄러움을 보고 죄와 잘못을 인정하고 민족과 나라에 잘못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제 사관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고, 자기 부모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또 그것을 강변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부끄런 역사관 안에 그대로 묻힌 자손들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군상들. 애처러운 사람들입니다. 부모가 그런 왜곡된 삶을 살았다하여, 자손들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 정의와 공정, 생명과 평화의 길은 하느님의 진리이고, 그 진리안에 새롭게 역사하시고, 더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의 과거에 향유했던 권리나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것을 또다른 권력이나 영예로 여기고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들, 참으로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어찌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겠습니까? 어찌 이런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 진리의 역사에서 영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가련하고, 애처로우며,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기 보다, 그전에, 그들 자신이 자기가 누구인지, 무슨 존재인지, 민족과 나라에 어떤 악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지 모르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민족과 역사와 세상의 참 가치속에 살지 못하는 그런 존재 자신들을 모르는 그들. 참으로 바보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가 있습니다. 해방 된지 73년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그런 군상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류(啞類)로 살아가는 사람들, 측은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배척하고 때리기 보다 오히려 측은지심을 갖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을 말해도 듣지도 보지도, 말할 줄도 모르는 그들입니다.


용서는 먼저 측은지심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그 다음으로 자비로써 행하게 됩니다. 그 자비 다음으로 용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거룩한 행업에서 먼저 측은지심이 있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아프고 소외되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그 마음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자비의 마음으로 그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 자비를 체험한 사람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길에서 내게 이런 측은지심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측은지심을 자비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내게 측은지심이 없다면, 자비도 없으며, 용서로 나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 측은지심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비로 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합니다. 그래야 용서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목요일 용서의 날입니다.

"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요한 20, 22-23


측은지심으로 바라봅니다. 그에게 자비를 주시도록 청합니다. 먀음의 용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살아갑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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