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서적 안내(1) 뛰어든 빈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설립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생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댓글 0건 조회 456회 작성일 18-12-12 15:59본문
뛰어든 빈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설립자 프레드릭 오자남의 생애)
추천의 글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4-17)
야고보 사도의 준엄한 질책이 프레드릭 오자남에게는 예외였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끝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의 삶에 자신을 헌신했던 프레드릭 오자남의 생애는, 시로 황량한 벌판에 피어난 한송이 꽃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프랑스 사회 전체가 아직 큰 혼란에 빠져 있을 1830년대, 회의주의자와 무신론자들이 그 혼란의 와중에서 기세 높이 판을 치던 시기에, 프레드릭은 용감히 일어나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적대자들을 당당히 대항하면서, 교회와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또한 신앙을 더욱 효과적으로 증거하고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1833년 4월23일 '자선 협의회' 를 섭립합니다.
이는 후일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의 모태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겸손한 종이 되어 그들 한가운데 '뛰어든 빈자' 프레드릭 오자남은, 그들을 누구보다 존경하며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그들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녔을 분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도록 보내주신 하느님의 전령으로 그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이 앎을 병을 앎아주고, 인간이 받을 고통을 겪어주고... 그 몸에 상처를 입임으로써 우리의 병을 낫게 해준"(이사53, 2-6) '상처입은 치유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의 병약한 몸 전부를 다 살라 끗끗이 증거해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무신론이 더욱 만연하고,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윤리 도덕이 극도로 타락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프레드릭 오자남의 살아 있는 믿음과 용기, 겸손과 봉사의 삶은, 더없이 귀한 신앙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레드릭은 어릴 적부터 지니고 있던 지병으로 40세란 젊은 나이로 아까운 생을 마쳤지만, 대학 교수와 변호사 및 문필가로서의 그의 업적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고 그가 생전에 그토록 열정을 쏟았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사랑과 봉사의 고귀한 뜻은, 오늘에 이르도록 많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1993. 5.30 지도 신부 김정남 바르나바
출처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한국이사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